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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형성 동역학 / 경제 물리학 / 전산 물리학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

2. 직업

  1. 직업

    이제 한 달 된 이야기.

    1월 초부터 백수가 되니 수능 이후 처음 생긴 시간이라 한 번 신나게 놀아보려 했는데, 열흘을 채 못 놀고 나니 놀 거리가 떨어졌다. 순수한 놀이는 제약이 걸려야 재미있다. 희한한 사실이지만 제약이 없어도 재미있는 행동은 놀이가 아니라 거의 다 일의 범주에 들어가는 행동이다.

    그럼 이제 무슨 일을 해볼까 고민을 시작했다. 어려운 고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해보고 싶은 것들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잘 적어 놓은 아이템 노트 및 연구 노트 몇 년 치가 있으니 그중 하나를 골라 하면 될 일이다. 1/3 정도를 읽고 나서 포인트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았다. 지금 해야 할 고민의 대상은 '해야 할 구체적인 일'이 아니라 '나'였다. 정말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문득 지난 십 년 동안 어떤 일을 하고 싶었는지 한 번 돌아보았다. 간단하게 줄이면 물리학자가 하고 싶었으니 물리학자가 되었는데, 그 과정 중 여러 일이 있었다. 날이 선 채로 살아온 시간을 죽 적어보다 보니 어쩐지 주저리주저리 길어서 머릿속에서 싹 지우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은 넘치고, 삶은 너무 짧다.

    딱히 엄청나게 잘하는 것이 없으므로 딱 맞는 일을 찾기가 어렵더라.

    연구는 즐겁고 재미있다. 머리에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몇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내 분야의 사이클이 너무 느리다. 박사 과정 시절 지도교수님과 속도에 관한 내용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요새 학계에서 발표되는 연구 중 많은 내용은 산업계의 bleeding edge의 몇 년 늦은 재탕이다. 이는 순수 과학을 제외한 다른 분야들이 거대과학 시대 이후에 공통으로 밟는 과정이기도 한데, 여러 분야의 연구와 해당 연구의 실용화의 시간 간격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다 보니 두 분야의 도달점이 어느 순간 역전되는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학계와 업계 양쪽에 발을 걸치다 보니 그런 부분들이 많이 눈에 밟히게 되었다. 경계선 위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서 드는 생각일 수도 있겠다. 엄청나게 끌리는 돌파구 또는 그걸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한 연구는 당분간 취미의 영역에 남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남이라고 가정하고 어떻게 조언할지 생각해보았다. 결과적으로 직업 또는 직업군을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맞는 답이 없을 때 자꾸 끼워 맞추려고 하면 근사해만 구할 수 있는데, 그걸로 만족할 수 있는가?

    얼마 전 zero to one이란 재미있는 책을 선물 받아 읽었다. 독서 후 깨닫게 된 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스스로 예상하는 미래가 있고, 그 예상이 확신의 영역에 있고, 예상이 확신으로 변하는 과정에 독특함이 필요한 일이라면 해 볼 만한 일이다. 그게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다른 사람보다 '특히' 잘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의 경우 미래에 대한 확신은 신념이 되고, 그 순간부터 결과보다 과정 자체가 원동력이 된다.

    그 기준으로 아이템 노트와 연구 노트를 펼쳐놓고 가부를 따져 보았다. 답은 결국 박사 학위 후 연구원 기간에 시작하려고 했던 일과 반쯤 겹치는 목표였다. 노트의 하고 싶은 일 목록에 처음 적힌 날짜가 2011년이니, 아이디어부터는 삼 년 반, 본격적으로 꺼냈던 시점 부터는 일 년 반 돌아온 셈이다. 생각해보니 돌아온 덕분에 시행착오를 많이 줄인 듯 하다. 황은진씨와 앉아 토론하며 대충의 방향을 잡은 후 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건강 문제가 아니면 훨씬 많이 만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아직도 현대화되지 않은 많은 연구 분야의 구조적인 뒤떨어짐을 해결하기 위한 연구용 플랫폼을 만들 예정이다. 지금의 방향으로 구체화 된 지 이제 한 달이 되는 날이라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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